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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생철학 후기(이용수)
번호   8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10-08 조회수   37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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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노빈 신생철학(新生哲學)을 읽고
이용수

남일당, 쌍용차, 철도파업, 비정규직, 반도체산업노동자 산재투쟁, 진주의료원 폐업, 밀양 송전탑, 고리원자력, 기장 해수담수화. 얼핏 떠올려 보는 우리 사회의 분열된 모습들이다. 우리 사회는 곳곳에서 분열되고, 대립하고, 증오한다. 땅이 쩍쩍 갈라지는 사막이 우리 사회의 모습이라면 그곳엔 생명이 없다. 풀 한 포기 나지 않고, 물 한 모금 들이킬 수 없는 사막에선 죽음뿐이다. 윤노빈 선생은 분열된 사회는 우리를 구속, 감금한다고 말한다. 구속, 감금된 우리는 고통 속에서 점점 죽음으로 향할 것이다. 분열의 고통에서 벗어나 자유와 해방을 추구해야할 당위성이 <신생철학> 쪽마다 활자로 각혈(?血)되어 있다.
분열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분열을 조장하는 원인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윤노빈 선생은 우리 사회 분열의 근본적 원인을 두 가지로 파악하고 있다. 첫째는 시각의 제한이다. 시각에만 의존하여 세계(대상)를 파악하기 때문에 세계(대상)를 전부 보지 못한다. 우리의 망막에 맺히는 상(像)은 세계(대상)의 전면뿐이다. 그것도 피상적인 전면뿐이다. 그렇게 보면 우리는 세계(대상)를 ㅅㆍ랑(사랑, 생각)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대상을 거리를 두고, 멸시(蔑視, 깔보고)하고, 물시(物視, 사물로 보는)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와 ‘너’ 사이에 틈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그 틈 사이로 비교하고, 시샘하고, 경쟁하는 마음이 싹튼다. 또한 시각에만 집착하면 점점 시야는 좁아진다. 궁극에는 낚시를 드리운 사람과 낚시 바늘은 보지 못하고 눈앞의 미끼만 보게 된다. 사회의 분열을 보지 못하고, 그 분열로 인한 고통을 인식하지 못하고 당장의 이익에만 급급한 우리의 일상이 이를 증명한다.
둘째는 서구의 요소론적 세계관이다. 서구철학은 관념론이든 유물론이든 종교든 과학이든 요소론적 세계관을 전제로 한다. 요소론적 세계관은 세계를, 대상을, 사물을, 인간을 구분하고 분류하고 분석한다. 그런데 그렇게 이분(二分)해 놓고 우열을 정하여 종속화시킨다. 정신과 육체로, 우리 신과 너희 신으로, 문명과 야만으로, 서양과 동양으로. 이러한 세계관으로 자연을 개발하고, 타종교와 타민족을 배척하고, 몸(생명)을 경시하고, 야만을 문명으로 이끌기 위해 정복하여 계몽한다. 결과적으론 그들은 선진 문명 사회를 이루어 편리와 안락 속에 있다. 그들이 편리와 안락을 추구하는 만큼 자연은 파괴되고, 후진국은 고통이 증가하고, 타종교는 증오심만 쌓인다. 그들은 그들의 짐을 타인에게 전가시킨 것이다. 그들이 편리한 만큼 우리는 불편하다. 그들이 부유한 만큼 우리는 가난하다. 그들이 안락한 만큼 우리는 고통스럽다. 이는 간단하다. 그들이 성찰적으로 내세우는 ‘공유지의 비극’이나 ‘엔트로피’의 원리로 이해될 수 있으니까. 심지어 그들은 그들의 편리와 부유와 안락을 추구하기 위해 우리를 갈라놓는다. 갈라진 땅에선 상쟁(相爭)뿐이다. 생명이 없고 죽음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의지해야할 이웃과 대립하고, 서로 증오할뿐더러 우리를 갈라놓은 그들을 떠받들고 모방하기에 여념이 없다. 그들과 같아지기 위해 끝없이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는 우리 사회의 균열된 틈을 메꾸어야 한다. 어떻게 메꿀 것인가. 윤노빈 선생은 고통을 주는 원인에서 벗어나고 초월하여 하나가 되는 길(해방, 통일)이라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우리 사회를 갈라놓는 원인(‘악마’의 속임수-성장, 개발, 발전, 진보 등)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즉 ‘악마’를 ‘밝음’(철학) 속에 노출시켜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전가의 보도처럼 강조되는 성장, 개발, 발전, 진보가 사실은 요소론적 세계관에서 비롯된 것임을 성찰할 필요가 있다. 성장, 개발, 발전, 진보는 경쟁, 파괴, 퇴보, 몰락의 샴쌍둥이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요소론적 세계관에서 파생된 수많은 담론이 사실은 우리를 분열시키는 인위적(人僞的-거짓) 담론들이었음을 간파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기존 인식을 완전히 갈아엎는 전신부(轉身府)가 필요하다. 윤노빈 선생은 진리논리, 즉 고통의 현장에서 고통을 유발하는 ‘악마’의 정체를 드러내는 철학(밝음을 드러내는 행위)을 전신부라 말한다. 무엇이든 상관있겠는가. ‘녹색 정신’도 좋고 ‘생태론적 세계관’도 좋다. 우리 사회의 분열의 틈을 메꿀 수 있는 무엇이라면, 분열의 틈 사이로 흐르는 고름과 피를 씻어낼 수 있는 무엇이라면 우리는 우리의 전신부로 삼아야 한다. 또한 윤노빈 선생은 시각의 제한성을 극복하기 위해 시각의 통일을 말한다. 대상을, 사람을 부분만 보고, 깔보고, 사물처럼 보던 시각의 제한성과 주관성에서 벗어나 ‘너’를 모시고(侍天) ‘너’를 계신다고 볼 수 있는 시각을 요구한다. ‘너’(대상)는 단순히 ‘있는’(존재) 것이 아니고 ‘계실’(생존) 때, ‘너’와 ‘나’는 진정한 ‘한울’(통일된 사회, 균열의 틈이 봉합된 사회)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즉 ‘너’와 ‘나’가 통일(하나)된 상태-‘한울’ 세상만이 우리 사회 곳곳에 만연한 틈을 메꿀 수 있다.
‘너’가 ‘한울’(人乃天)이 되고 ‘나’가 ‘한울’(人乃天)이 되고 ‘우리’가 ‘한울’(人乃天)이 되는 세상. ‘너’와 ‘나’가 무궁(無窮)한 꽃이 되는 세상. 그런 세상을 만들 비, 즉 사막의 갈라진 땅을 메꾸고 기름지게 만드는 한우(大雨-큰비)는 어떻게 내릴 것인가. ‘나’와 이웃한 ‘너’를 모시는(侍天) 순간, 빗방울이 만들어지기 시작할 것이다. 빗방울이 모이고 모여 큰비를 내릴 때, 그래서 사막이 옥토로 변하고 무궁화 만발한 세상이 윤노빈 선생이 원하는 세상이다. 그런 세상의 도래를 위해 가장 큰 고통의 현장(북한)으로 가는 고행을 선택했는가. <신생철학>은 그런 선생이 우리에게 ‘제발 생각을 바꾸라’고 피를 토하며 쓴 글이다. 생각만 바꿀 것인가. 행동으로 옮겨야(體天) 할 것이다. 자연을 보호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균등하게 가지려고 노력하고, 모두 같이 일하고, 모두 같이 웃으려고 한다면, 틈을 메꾸는 행동이, 인식이 버릇처럼 된다면 윤노빈 선생의 ‘무궁화 피는 한울’은 이루어질 수도 있지 않겠는가.
내가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이십년 전보다 지금 사회는, 자본주의적 척도로 말하면 놀라운 발전을 이루어 냈다. 하지만 체감온도라고 말할까. 개인적으론 그때보다 삶이 더 곤궁해졌다. 어느날 문득 그렇게 느꼈던 것도 아니고 물질적인 측면만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친구들과 만나 술을 마시고, 여행을 가고, 가족과 외식을 하고,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고, 소설을 읽는 것이 일상이라고 한다면 그 일상이 점점 쪼그라드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게 자본주의 시스템 탓일 거란 막연한 생각을 했다. 그러나 경쟁에서 밀리지 않으려고 새벽에 일어나 밤늦게까지 일했다. 그리고 날마다 술을 마셨다. 사회생활이라는 핑계로. 하지만 이게 아니라는 회의는 짙어만 갔다. 그리고 사회의 문제를 인식하는 빈도가 증가했다. 하지만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는’ 수준에 불과했다. 윤노빈 선생 식으로 말하면 나는 미끼만 바라보며 허겁지겁 살아온 것에 불과하다. 권력과 자본이 주입하는 생각만 추종하는 노예에 다름 아니다. <신생철학>은 새 삶을 말한다. 누군가 ‘읽기의 혁명성’을 말하였던가. 읽기 전과 읽은 후의 달라짐(革). <신생철학>을 읽은 후 나는 벌거벗은 상태다. 인식을 겹겹이 싸고 있던 모든 옷을 벗어던졌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나의 인식과 행위가 인위적(人僞的-거짓)이지 않기 위해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조심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