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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중, 독립군의 길을 걷다 후기(고호석)
번호   7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10-08 조회수   38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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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중국경 후기_고호석.pdf
블라디보스톡에서 옌지(延吉)까지
2015. 7. 19 ~ 7. 28.


출발: 7월 19일(일) - 부산, 블라디보스톡
7월 중순답지 않게 쾌청하면서도 그닥 덥지 않은 멋진 날씨다. 19세기 중반 이후 우리 선조들의 고난과 불굴의 투지, 그리고 독립운동의 궤적을 살피는 이번 기행의 시작이 좋다. 두 번의 예비 모임과 이런저런 인연 속에서 대부분 안면을 익힌 동행 23명은 너나없이 다소 들떠 있다. 7월 19일 오후 8시 경 김해공항을 이륙한 러시아항공 비행기는 한 시간 남짓 만에 블라디보스톡 공항에 착륙했다. 구 소련의 태평양 쪽 전진을 위한 해군기지라는 오랜 인상 탓일까, 아니면 북한보다 더 먼 북쪽에 있다는 거리감 탓일까? 대여섯 시간은 족히 걸릴 것 같았는데 겨우 한 시간 반 남짓! 질기고 딱딱한 러시아 빵에 약간의 야채를 넣은 아주 소박한(?) 기내식이 아직 위로 넘어가지도 않은 듯한데 우리는 러시아 땅을 밟은 것이다.
얼마 전에 이곳에서 열린 APEC 정상회담 덕에 공항과 주변도로들이 깨끗하게 정비되어 있어 정말 다행이었다. 러시아인들이 도로를 자신들의 ‘3대 수치’ 중 하나로 꼽을 만큼 도로사정이 나쁘다는데 왠 횡재?! 마치 우리 일행을 위해 여러 정비를 해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도로사정이 워낙 나쁜 것은 낙후된 인프라 탓도 있지만 연중 일교차가 워낙 크기 때문에 시멘트나 아스팔트가 견뎌낼 수가 없는 게 더 큰 이유라고 하니 이해가 되기도 했다.
근데 ‘3대 수치’가 뭐냐고? 말하는 이에 따라 조금씩 다를 순 있겠지만, 대체로는 남자, 도로, 날씨란다. 날씨는 이해가 되는데 남자? 왜?.... 추운 날씨 탓에 주정뱅이와 게으름뱅이들이 워낙 많아서, ㅎㅎ 그럼 ‘3대 자랑거리’도 있나? 당연 있다! 미녀, 철도, 보드카! 슬라브계의 조각 같은 미녀들,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비롯한 세계 2위의 길이를 자랑하는 철도(부실한 도로를 보완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보면 될 듯하다), 그리고 맑고 도수 높은 술 보드카. 대체로 고개가 끄덕여지지만 그럼 자기들이 자랑해 마지않는 보드카 때문에 부끄러운 남자들이 생기는 건데, 이 모순을 어떡하지?? ㅋ
대국 러시아는 그러잖아도 일부 대도시를 제외하고는 많이 낙후되어 있었는데, 최근 우크라이나 사태와 항공기 피격사건, 야당 지도자 암살사건 등으로 정치적으로만이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적잖은 타격을 받아 상당히 어려운 형편인 듯했다. 하지만 KGB와 마피아를 좌우에 거느린 푸틴의 권력은 절대적이고 대다수 국민들은 그저 체념하듯 살아간다고 한다. 저 엄청난 양 날개가 머지않아 자신을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주범이 될 게 뻔한데 왜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는 걸까?....
숙소를 향해 달리는 길 옆에는 광고판들이 자주 나타나는데 삼성과 엘지 간판도 심심찮게 보인다. 러시아 사람들은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엘지와 삼성의 가전제품들은 시장점유율 1위를 다투며 신뢰도가 아주 높다고 한다.
밤 12시쯤에야 숙소 객실에 들어올 수 있었다. 겉보기엔 멋진 호텔인 듯했지만 일부만 리모델링을 한 모양이고 객실은 허름한 시골 모텔 수준? 좀 재밌는 것은, 대부분의 투숙객이 출입하는 주차장 쪽은 지상에 겨우 방 한두 칸 정도의 현관만 불쑥 솟은 형태인데, 안으로 들어서면 정작 그곳이 8층! 바다 쪽에서 보면 길이가 200m는 실히 됨직한 7층짜리 대형건물이 버티고 서 있다! 깜놀!^^







많이 늦긴 했지만 짐을 풀고 바로 1층 로비로 내려갔다. 처음으로 일행 23명과 가이드가 한자리에 모여앉아 가볍게 맥주 한 병씩 병나발을 불며(오해 마시라, 컵이 없어 어쩔 수 없었으니....) 내일 일정을 의논했다. 현지 사정상 꽤나 일정 변경이 있을 듯. ㅠㅠ

2일째: 7월 20일(월) - 블라디보스톡, 순야센
깊이 잠들지 못하고 뒤척였으나 백야의 영향으로 일찍 일어났다. 5시도 안되어 해가 뜨는 것 같았다. 날이 흐리긴 했으나 일찍 환해져 계속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타국에서의 첫날이기도 하고....
오늘은 주로 블라디보스톡 시내 관광이다. 물론 그 속에 신한촌 기념비 방문도 포함되어 있지만. 이곳의 신한촌은 연해주 고려인들의 고난과 독립정신이 고스란히 녹아있던 곳이다. 지금은 기념비 외에는 그 어떤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1864년 무렵, 초기 정착민들이 피땀 흘려 가꾸어 놓은 거주지는 콜레라 창궐을 핑계로 러시아 군부대에 빼앗기고 변두리였던 이곳 허허벌판으로 밀려났다. 그래도 고려인들은 특유의 근면성으로 마을과 농경지를 일구고 ‘새로운 한국’을 기원하는 의미로 신한촌이라 이름 지었다. 신한촌이라는 이름은 이곳 외에도 만주 곳곳에 있었다고 하니 당시 우리 조상들의 염원을 가늠해 볼만하다.
하지만, 그토록 피땀 흘려 가꾸고 학교도 세워 독립운동의 기지 역할을 톡톡히 했던 이곳은 1936년 스탈린의 강제이주 조치로 단 며칠 사이**에 폐허가 되고 만다! 1천 5백 명에 이르는 민족 지도자들을 살해하고 17만 명을 한겨울 혹한 속에서 짐짝처럼 기차에 실어 중앙아시아까지 강제이주 시킨 이 조치는 스탈린이 이끌던 소비에트 정부의 본질을 여실히 드러내는 잔혹한 살육만행이었다. 수많은 노약자와 어린이들이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죽어 철로변 시베리아의 눈밭에 내팽개쳐졌고, 겨우 살아남은 이들을 맞이한 것은 아무 것도 없는, 눈보라 휘몰아치는 황무지뿐이었다. 지금은 카자흐스탄이나 우크라이나 등으로 독립한 그 들판에서 그들은 움막을 짓고 또 농경지를 일구었다. 요즘은 그곳이 세계적인 곡창이고 면화생산지이지만 그 지역에서 벼농사와 면화농사가 가능하도록 만든 것은 바로 고려인들이었다. 약소민족과 피억압 민중을 위한 체제라는 소비에트가 이다지도 가혹한 만행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러시아 문자를 만들었다는 키릴 형제의 동상이 항구와 금각교를 내려다보고 있는 독수리전망대와 혁명광장, 그리고 러시아정교회 대성당을 둘러보고 우리 일행은 블라디보스톡 역으로 갔다. 러시아 인 70%가 믿는다는 러시아 정교회는 그리스정교회가 러시아화 된 종교이다. 두 세 시간 동안 계속되는 예식에는 강론이 없고 모두가 서서 참례한다고 한다. 그리고 꼭 미사 처음부터 끝까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고 개인의 사정에 따라 출입할 수 있다고 하니 많은 영역이 개개인이 자유의지에 맡겨져 있는 게 아닌가 싶다. 헌금 하는 순서도 없고, 교인들이 자신의 소원을 빌 때 사용하는 양초 값이 교회의 주 수입원이라고 하는데, 양초 하나에 얼마나 받을까? 궁금??
블라디보스톡 역 건너편에 레닌의 동상이 서 있었다. 이 동상을 보니 ‘아! 내가 정말 러시아에 왔구나!’ 실감이 났다. 러시아 혁명의 상징 레닌! 드라마틱한 러시아 역사 속에서 부침을 거듭한 그의 운명과 함께 그의 동상도 철거됐다 다시 세워지길 여러 번, 이곳에 자리 잡을 때까지 곡절도 많았다고 한다. 20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레닌은 입에 올리기도 어려운 인물이었다. 그의 책 한권을 가지고 있다 발각되면 바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던 것이다. 타국에서나마 그의 동상을 찾아 바라보고 있으니 온갖 감회가 마음을 어지럽힌다.
블라디보스톡 역은 역사적으로나 예술적으로나 상당히 의미 있는 곳이다. 역 건물이 매우 아름다운 것이 우선 눈에 들어오고, 이 역이 그 유명한 시베리야 횡단철도의 출발점이자 종착역이기 때문이다. 여기엔 니콜라이 2세가 세웠다는 기념조형물도 있고, 그 옛날 이곳을 달렸던 기차도 전시되어 있다. 역 건물 내부는 천장 벽화를 제외하고는 매우 담백하게 만들어졌는데 작은 성소를 만들어 기도를 드릴 수 있게 해 놓은 것이 무척 이채로웠다.
우리는 이곳에서 전동기차를 타고 해안을 따라 내륙 쪽으로 한 시간 가까이를 달려 우골라야라는 아담한 시골 역에 내려 다시 버스로 갈아탔다. 시베리아 횡단척도 끝자락을 맛본 샘이었는데, 내륙 쪽으로 난 깊숙한 만을 따라 달리는 풍광이 우리의 동해남부선 어느 구간처럼 아름다웠다.
저녁 무렵 우리가 도착한 순야센 고려인 정착마을은 일반 관광객들이 잘 찾지 않는 곳이라 버스 기사가 길을 찾는데 다소 애를 먹었다. 여장을 풀자마자 샤슬릭이라는 큰 꼬치요리를 주로 한 풍성한 저녁식사를 했다. 숙소나 식당이나 몹시 허름했지만 보드카를 곁들인 푸짐한 저녁식사에 모두 만족해했다. 식사를 마치고 그 바로 옆에서 한참동안 드넓은 지평선 너머로 아름답게 물드는 석양을 함께 감상하며 노래도 부르고 사진도 찍으며 이국의 정취를 맘껏 즐겼다. 그리고 이어진 캠프파이어!
돌아가며 자기소개도 하고 노래도 불렀지만 술은 또 다들 어찌 그리 잘 마시는지...... 구체적으로 밝힐 순 없지만 경이적인 양이었다.^^

3일째: 7월 21일(화) - 순야센, 우수리스크
아침 일찍 일어나 된장국에 밥을 먹고 마을을 둘러보았다. 이곳 고려인들은 된장국을 먹지 않기 때문에 김정곤 샘이 요리 실력을 발휘했음을 꼭 밝혀 두어야 할 것 같다. ㅎ
소비에트가 붕괴하면서 소 연방이었던 여러 나라가 독립을 하게 되자 우크라이나와 카자흐스탄에 자리 잡고 살던 고려인 상당수가 연해주로 다시 돌아오기 시작한다. 토착 언어로 국어가 바뀌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했고, 이전에 살던 연해주에 애착을 느낀 이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인데, 그들 대부분은 중앙아시아에서도 별로 기반을 잡지 못하고 어렵게 살던 분들이었다. 연해주 지역에도 그들의 옛 터전은 파괴된 지 오래였기 때문에 국내의 여러 시민단체들이 힘을 모아 그들의 정착을 위해 여러모로 노력을 기울였다. ‘우정마을’에 교육문화센터를 세우기도 하고 이웃 순야센에는 생태농장과 마을을 만들어 콩을 재배하고 두부, 된장, 청국장 등을 만들어 국내에 있는 ‘바리의 꿈’이라는 사회적 기업을 통해 판매도 하게 되었다. 우리는 떡 방앗간, 표고버섯 재배 하우스, 두부공장, 메주공장 등을 둘러보고 농가도 방문했다. 참 어려운 여건에서도 밝게 삶터를 가꾸어 가는 분들의 모습도 반가웠지만, 그들을 지원하기 위해 온 가족이 이곳으로 와 10년 가까이 살고 있는 자원활동가의 삶은 참으로 존경스러웠다. 나도 8년쯤 전에 고려인들의 재이주를 돕기 위해 약간의 기부를 하긴 했지만 기회가 되면 좀 더 많은 도움을 드리고 싶었다.
센터 앞에서 흥겨운 이별의 이벤트를 하고 11시쯤 우수리스크로 향했다.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이상설 선생의 유허비였다. 옛 발해의 솔빈부가 있었던 작은 언덕, 솔빈(수이푼) 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선생의 유허비가 있었다. 우리는 그저 이준 열사와 함께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의 밀사로 파견되었던 사람 정도로 기억하고 있지만, 연해주에서 만나는 그는 훨씬 큰 인물이었다! 을사조약 채결 직후 연해주로 망명한 그는 서전서숙을 세워 후진을 양성하는 한편 백방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분투했다.
이번 여행을 다니며 우리의 역사교육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근현대사를 가르치면서 너무 한반도 내부 중심으로만, 또는 몇몇 큰 사건 중심으로만 우리의 시선을 국한해서 수백만 동포가 고초를 겪고 또 조국 독립을 위해 노력했던 그 많은 역사들은 무시되거나 왜곡되고, 그리하여 잊혀 져 가고 있는 것이다.
그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최재형 선생이라 할 수 있다. 노비의 자식으로 태어나 이런 시절 외국인의 눈에 띄어 7년여 세계를 견문하고 다시 연해주로 돌아온 그의 일생은 우리 민족을 위한 헌신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글에서 낱낱이 다 얘기할 순 없지만, 이 지역 동포들을 위한 노력뿐만 아니라 해외독립운동사에서도 그가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가볍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의 이름조차 모르고 지내왔던 것이다. 이제라도 이런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는 데 우리들의 관심이 기울여져야 하리라.
2004년에 고려인들의 연해주 정착 140주년을 기념하여 세운 ‘140주년 기념관’에서 비빔밥을 먹고 실무자로부터 이곳 상황에 대한 간단한 설명도 듣고 전시관도 관람했다. 조 엘레나라는 그 실무자는 작년에 어린이 희망학교에 참가해 우리 집에서 이틀간 홈스테이를 했던 비올레타를 잘 알고 있어 더욱 반가웠다.
애초 계획으로는 이날 오후 크라스키노로 가서 숙박하기로 했으나 숙소 사정이 여의치 않아 내일 일찍 떠나기로 하고 우수리스크에 여장을 풀었다. 이름도 모르는 맛있는 요리와 쌀밥, 독특한 김치볶음, 새우튀김, 치킨 등으로 배불리 저녁식사를 했다. 식사를 하고 나오다 그 앞에서 가족끼리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전형적인 슬라브계 가족을 만나 얼떨결에 같이 사진을 찍기도 했다. 내일의 빡빡한 일정을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으나 이런저런 생각에 잠을 설쳤다.

4일째: 7월 22일(수) - 우수리스크, 훈춘
새벽 5시가 못되어 일어났다. 빨리 준비를 하고 아침식사는 도시락으로 준비하여 버스에 올랐다. 크라스키노에서 12시 경에 국경버스를 타고 중국으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4시간 가까운 여정동안, 일행 대부분은 끝없이 펼쳐진 광야를 바라보며 부러움과 아쉬움 등 여러 감회를 토로했다. 그 들판에 온갖 농장과 별장이 동행들의 머리 속에 세워졌다 사라지기도 했다.^^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은 안중근 의사 등 12인의 단지동맹비. 2012년에 좀 더 모양을 갖춰 이전한 이 비는, 그 12분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결의하며 무명지를 잘라 ‘대한독립’ 혈서를 태극기에 쓴 일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원래는 좀 더 일반인의 접근성이 좋은 곳에 설치되었으나 이런저런 수난을 겪다 현재의 자리로 온 이 비는 농장 입구에 안 의사의 유허비와 함께 세워져 있었는데, 탁 트인 평야가 내려다보이는 풍광이 썩 어울리는 곳이어서 마음이 흡족했다. 이역만리 타국의 어느 구석진 곳에서 자기 몸의 일부를 잘라내며 망해가는 조국을 살려보겠다고 결연히 맹세했던, 그러나 안중근 의사를 제외하고는 그 이름조차 거의 알려지지 않은, 그리고 유해조차 고국에 돌아오지 못한 그분들이 그나마 저 아늑한 들판을 내려다보며 쉴 수 있으리라 위안하며 다시 버스에 올랐다.
가랑비가 살짝 내리는 가운데 우리는 전망대에 올랐다. 사방이 탁 트여 과거엔 군사적 요충지였다는 그 전망대 한가운데는 어느 러시아 장군의 동상이 서 있었지만, 우리 일행은 거기엔 거의 시선 한번 주지 않고 안개 속에 저 멀리 내려다보이는 옛 발해 동경성터의 스러져버린 영화와 북녘땅 끝자락을 감싸고 흐르는 두만강을 마음의 눈으로 더듬으며 감회에 젖었다.
이제 우리는 중국으로 가야 한다. 국경버스 시간에 맞추기 위해 이른 점심을 먹고 버스에 올랐다. 러시아혁명과 2차대전 등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힘없는 조국을 떠나 춥고 척박한 이국땅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참혹한 고난을 겪어내야 했던 조상들과 고려인들. 그런 속에서도 억척스레 떨쳐 일어나 삶터를 일구고 조국 광복을 위해 기꺼이 모든 것을 바쳤던 선조들의 땅을 떠나, 중국이라는 또 다른 체제와 역사 속에서 신산스런 삶을 이겨내었던 조선족의 땅으로 향하는 것이다.
거리는 멀지 않으나 국경을 넘어야 하기 때문에 과거엔 3~5 시간이 결렸다는 곳을 우리 일행은 한 시간 반 만에 넘었다! 길도 좋아졌고 러.중 간의 관계가 좋아지면서 시간이 많이 단축된 것이다. 우리가 한국인이라는 것도 좋게 작용하는 것 같았다. 나라의 경제력이 국제사회에서 미치는 영향력인 것이다. 그 한 예로, 러시아 사람들은 한국이라는 나라는 잘 모르지만 삼성, LG, 현대 등은 잘 알고 있어서 한국에서 수입해 간 중고차량들을 원래의 디자인을 그대로 살려 사용하고 있었다. 그걸 지워버리면 다시 팔 때 가격이 형편없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 점은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도 비슷하다. 그래서 우리는 이국의 도시에서 청량리나 미아리로 가는 버스들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여기는 중국 길림성의 훈춘. 예상보다 국경을 넘는 절차가 빨리 진행되었고 도로사정이 많이 좋아져 예상보다 훨씬 빨리 숙소에 도착했다. 시간 여유도 있고 해서 러시아에서 가 보지 못한 핫산을 대신해 조, 러, 중 3국 국경이 만나는 중국 쪽 지역을 가보려 했으나, 현지 사정을 잘 모르는 우리 일행이 숙소에서 시간을 절약하지 못해 그 지역으로 들어갈 시간을 놓쳐버려 또 한 번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ㅠ
덕택에 호텔에서 쉴 수 있는 시간이 많았다. 저녁식사는 숙소 바로 옆에 붙은 ‘평양가무식당’에서 먹었다. 북한이 외화벌이의 일환으로 운영하는 곳으로 저녁에는 평양가무단의 공연도 있었다. 오후 6시 30분, 예약된 시간에 식당 문을 들어서는데 입구에서부터 화려한 한복과 공연복을 입은 여성들이 양쪽으로 도열하여 깍듯이 인사를 하는 게 아닌가! 편치 않았다. 굳이 이럴 필요가 있을까?...... 식사는 중국 코스요리와 비슷했는데 공연단원들이 서빙도 했다. 우리에게 더 놀라운 것은, 우리가 주문한 술을 일일이 그 여성들이 따라주는 것이었다. 술병을 식탁 위에 두면 우리가 따라 먹겠다고 해도 웃기만 할 뿐 끝까지 그렇게 했다. 공연이 시작되고 그들이 번갈아 가며 무대에 오를 때도 틈틈이 와서 술을 따르고 음식을 날랐다! 그리고 실내에서는 일체의 사진촬영을 못하게 했다. 자신들의 얼굴이 찍히면 안 되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왜 그러느냐고 조심스레 물었더니 “우리 규정입네다”라는 짧은 답만이 돌아왔다. 이날 회갑을 맞은 박 철 목사님께는 가수가 노래를 부르며 내려와 술을 따르며 축하하기도 했다.
나름 극진한 대접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 일행 대부분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식사가 끝나고 꼬치집으로 자리를 옮겨 노상에서 2차를 할 때도 화제는 그 식당 언저리를 맴돌았고 분위기는 가라앉아 있었다. 사람마다 생각은 조금씩 달랐지만, 또 하나의 조국인 북한이 당당해 보이지 않는다는 게 대체적 분위기였고 그 때문에 슬프기도 하고 화도 난다는 것이었다. 중국에 도착한 첫날, 깨끗한 분위기에서 잘 먹었지만 우리 가슴엔 먹구름이 가득했다.

PS: 이 일이 계속 뇌리를 떠나지 않아 다음날 우리를 안내해 준 배 선생에게 ‘가정이나 식당에서 집 안주인이나 종업원이 손님에게 술을 따르는 풍습이 이 지역에 있는지’ 물었다. 배 선생은 조선족을 위한 여러 일을 하면서 북에도 자주 다니는 분이다. 그의 대답을 요약하면, ‘가정집에서 안주인이 손님에게 술을 따르는 문화는 연변이든 북이든 없다. 단, 고급 주점에서 여종업원이 귀한 손님에게 술을 따르는 일은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 정도라면 남한과 별 다를 게 없는데, 굳이 해외에 파견된 예술인이 왜....? 상당히 엄격한 선발과정을 거치는 것으로 아는데 좀 더 품위를 갖출 순 없는 걸까? 이번 여행의 성격상 이와 관련된 많은 생각들이 여정을 따라가며 끝까지 아어질 수밖에 없었다.

5일째: 7월 23일(목) - 훈춘, 도문, 이도백하
같은 식당에서 간단히 아침식사를 하고 짐을 챙겨 호텔 로비로 내려왔다. 널찍한 로비에는 물 위에 하얀 그랜드 피아노가 한 대 놓여 있었는데 잠시 후 하얀 드레스를 입은 아가씨가 상당히 숙련된 솜씨로 재즈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신선하기도 하고 음악이 좋았으나 그 연주자가 북의 여성인데다 물 위에서 연주하는 모습이 어제 저녁의 가무단 여성들과 오버랩 되면서 우리 일행의 분위기가 일순 가라앉았다.
버스를 타고 도문으로 향했다. 우리는 곧 두만강과 만났다. 아, 두만강! 말은 많이 들었지만 강 중류이고 여름인데도 흐르는 물줄기는 온천천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저 강 건너에 북녘 땅이 있다! 배 선생의 안내로 다른 여행객들이 잘 다니지 않는 강변로를 따라 북녘 땅을 바라보며 달리다 인적이 드문 다리를 보러 갔다. 북한과 중국을 잇는 이 다리는 국경 지점에서 약간 층이 져 있었는데 우리 일행은 그곳까지 가서 기념사진을 찍고 재빨리 철수했다. 사진촬영을 금지하는 현수막이 붙어 있었기 때문인데, 나는 괜한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아 그곳까지는 가지 않았다. 국가보안법 위반 전과가 있는 자의 과민증일까? ㅎ 이젠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그 난리를 겪어본 사람들은 자연히 자기검열을 하게 되는 듯하다.
도문에서는 조선족 소학교의 교장선생님을 만나 학교 방문을 했다. 어제 배 선생에게 우리 일행 중에 교육과 관련된 분들이 많은데 조선족 학교를 하나쯤 방문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지나가는 말처럼 얘기했는데, 따로 신경을 쓰신 모양이다. 학교가 보수공사 중이라 내부 구경을 할 수 없어 다소 아쉬웠지만, 교장 선생님과의 대화를 통해 중국의 교육제도와 조선족의 교육현실 등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어 좋았다. 중국은 학제나 의무교육 등 여러 면에서 우리와 비슷했는데, 교육열이나 교사에 대한 처우 등은 우리만 못한 것 같았다. 조선족들은 한국 취업이나 중국 대도시로의 취업 등이 급격히 늘면서 그 숫자가 현저히 줄었고, 따라서 학생 수도 많이 줄어 조선족 학교들은 통폐합 되는 추세라고 했다. 연변조선족자치주도 예전엔 조선족의 비율이 60%를 넘었으나 지금은 그 비율이 역전되어 40% 정도 밖에 안 돼서 자치주로서의 요건마저 위협 받는 상황이라고 했다. 그나마 과거 항일전쟁에서 조선족의 공헌과 남북한과 중국의 외교관계 때문에 아직은 현상유지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학교 가까이에 있는 두만강공원에서 뱃놀이도 하고 기념사진도 찍으며 휴식을 한 후(난 배를 타지 않고 교장 선생님과 여러 얘기들을 나누었다), 도문에서 가장 맛있다는 평양냉면을 먹으러 갔다. 냉면도 워낙 양을 많이 주는데다 다른 요리들도 몇 가지를 시켜서 배가 터지도록 먹었다. ㅋㅋ
우리를 태운 버스는 봉오동 전적지를 향해 달렸다. 1920년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우리 독립군이 일본군을 유인하여 대승을 거두었던 봉오동 유적지는 지금은 큰 댐을 쌓아 지형이 많이 바뀌었으나 댐 위에서 협곡을 내려다볼 수 있었고, 그 아래쪽에 전적비도 세워져 있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이 전투는 우리 독립군의 사기를 크게 높여주었고 그해 10월 청산리에서의 역사적 대첩의 서곡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백두산을 오르기 위해 고원지대인 이도백하로 간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산길을 휘감고 돌아 점점 고원을 향해 올랐다. 침염수림이 더 짙어지고 때때로 나타나는 평원에는 옥수수 밭이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4시간이 넘게 창밖을 내다보며 벌써 백두산 중턱에 다다른 기분이 들었다.
이도백하에서는 유일하게 조선족이 운영하는 숙소에 들었다. 이전에는 이곳에도 조선족이 운영하는 가게가 많았으나 대부분 외지로 빠져나가고 이 한집만 남아있다고 한다. 오늘은 또 이순일 선생의 회갑날이다. 술 마실 핑계가 없을까 염려하셨는지 이 여행 중에 생일을 맞는 분이 3명, 그중에서도 두 분은 회갑이다! 축하주가 없을 수 없고, 그 분위기는 식사 후 김정곤 선생 방으로 이어져 보드카와 고량주가 뒤섞인 흥겨운 주연이 벌어졌다.

6일째: 7월 24일(금) - 아, 백두산!
모두들 가슴이 설레었다. 드디어 백두산을 오르는 날이다. 아침 날씨가 흐리고 어제 한 차례 소나기도 내려 염려가 없진 않았지만, 하나님 빽이 든든한 목사님도 계시고 네 번 백두산에 와 모두 맑은 천지를 봤다는 단장 이광호 샘도 계셔 걱정을 붙들어 매었다.
백두산 입구에 이르니 웬 인파?! 매표소에서부터 긴 줄이 구불구불 꼬리를 잇고 있었다. 기다리면서 자세히 보니 한국인이나 조선족은 극소수고 대부분이 중국인이었다. 휴일도 아닌 오늘, 넓은 중국 땅 다 놔두고 왜 이렇게 몰려왔을까?? 일행 중 누구는 ‘인해전술’이란 말이 떠오른다고도 했다. 하지만 냉정히 생각해 보면, 여기도 엄연히 중국 땅이고 중국 인구의 10% 정도인 2억 명은 자주 관광을 다닐 여유가 충분한 사람들이라니 어쩌면 이게 자연스러울 지도 모른다. 더구나 선 정상에 큰 호수를 이고 있는 산은 드물기도 하니 말이다.
아직은 질서의식이 많이 부족한 중국인들이지만 백두산 등정을 위한 시스템은 정말 잘 만들어져 있었다. 이 매표소까지는 각자 알아서 오지만 여기서부터 경사로 입구까지는 셔틀 버스를 타야하고, 거기서 내려 다시 공용지프를 타고 정상 부근까지 오르게 되어 있었다. 물론 그때마다 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지만 각각 200대가 훨씬 넘어 보이는 차량들이 쉴 새 없이 오르내리며 그 많은 인파를 나르고 있었다. 우리나라보다 훨씬 체계적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다른 건 몰라도 이런 건 배워야 할 것 같았다.
이도백하를 출발해서 지프 승차장까지는 거의 3시간 가까이를 달렸지만 거의 굽이길이 없는 완만한 직선주로였다. 그만큼 백두산은 컸고 우리는 이미 많이 올라와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지프를 타자 급경사와 급커브길이 잇달아 나타났다. 이 길에 너무나 익숙한 운전자는 급커브에서도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계속 좌우로 심하게 쏠리는 몸을 가누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좌우를 둘러보았다. 사진은 찍을 엄두도 낼 수가 없었다. 내 손은 두 개 뿐이라 몸 지탱하기에도 힘겨웠으니까... ㅠㅠ 침엽수림과 자작나무 숲이 계속 이어지더니 어느 순간부터 키 큰 나무들이 사라지고 낮은 풀들과 화려한 들꽃들만 자태를 뽐내고 있었고 곧이어 황량한 바위산이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정상에 가까이 왔다 는 얘기였다.
지프 주차장에 내려 천지를 향해 출발! 그러나 여기도 인산인해. ㅠ 200m 남짓 될 것 같은 거리였지만 산 정상에 한꺼번에 많은 사람이 몰리는 것을 막기 위해 인원을 계속 제한하고 있어서 천지를 친견하는 데는 적지 않은 시간이 또 걸렸다. 드디어 마지막 계단을 오르는 것이 허용되었고 우리는 좌우를 완상하며 천천히 올라갔다. 큰 바위들이 앞을 가로막고 선 곳에 다다른 순간 난 크게 심호흡을 했다.
아, 천지!!! 안개와 구름이 시계를 상당히 가리긴 했지만 오히려 그것이 더 신령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했다. 상상했던 것보다 꽤 컸고 그 주위를 천천히 돌면서 조금씩 다른 모습을 감상할 수 있었다. 직접 눈으로 보니 왜 이곳을 우리 민족의 발원지라고 하는지, 왜 백두산이 우리 민족의 영산인지 절로 깨달음이 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먼 길을 달려, 또 이렇게 많은 사람들 속에서 차례를 기다려 이걸 꼭 봐야 하나 하는 회의도 있었지만, 천지를 마주하는 순간 그런 불경스런 생각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이 분위기도 나쁘지 않지만, 정말 맑은 하늘 맑은 천지를 보러 다음에 또 와야겠구나 싶었다. 그러면서 또 북녘, 내 나라 땅을 밟고 이곳까지 올 수 있다면, 그래서 맑은 천지 물에 손 한번 담가 볼 수 있다면.... 하는 진한 아쉬움이 밀려왔다. 그건 나에게만 좋은 게 아니라 북한 인민, 북한 경제에도 얼마나 좋으랴! 매표소를 들어서 여기까지 오는데 우리 돈으로 약 8만원을 지불했다. 오늘 하루에만도 수만 명이 다녀가는 것 같은데 북측이 백두산 저편을 자연친화적으로 잘 개발하면 매일 수억 원의 관광수입과 엄청난 고용유발효과를 볼 수 있지 않겠는가! 외교적 고립과 경제봉쇄 때문에 당하는 북한 주민들의 저 고통을 백두산과 금강산, 묘향산 정도의 효율적 개방만으로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건 우리 남측에도 결코 나쁜 일이 아니며 상호 교류를 활성화하는 좋은 매개수단이 될 터인데..... 남과 북의 집권자들이 원망스럽기 그지없다!
천지를 내려온 우리 일행은 장백폭포로 향했다. 다시 셔틀버스를 타고 침엽수가 우거진 길을 한참 달려 주차장에 내렸다. 점심이 마땅찮아 컵라면 - 정말 맛 없는 ㅠ ? 으로 간단히 때우고 장백폭포로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여기도 사람들이 아주 많아 앞 사람 등짝과 엉덩이만 보며 계속 이어지는 계단을 올라야 했다. 그런데 정작 폭포 가까이는 접근도 할 수 없게 막혀 있어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해서 저으기 실망스러웠다. 가까운 곳은 낙석이 위험해서 막아놓았다는 설명을 듣긴 했지만 장엄한 폭포가 발 아래 물보라를 일으키며 떨어지는 장관을 상상했는데....
오히려 폭포에서 주차장으로 내려오는 길이 참 예쁘고 아늑해서 그것이 더 볼거리라는 생각이 들었고 큰 위안이 되어주었다. 나무 데크로 만들어놓은 하산 길옆엔 마치 누군가가 가꾸어 놓은 것처럼 형형색색의 여러 들꽃들이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우리는 다시 셔틀버스에 올라 지하삼림을 보러 갔다. 단층작용으로 푹 꺼진 땅 위에 숲이 우거져 붙여진 이름인데 약간 신기하긴 했지만 큰 감흥을 주진 않았다. 여기서도 한 시간 남짓 걸린 숲길 산책이 상쾌한 삼림욕의 즐거움을 주어 더 좋았다.

이제 백두산을 뒤로 하고 두만강 발원지를 거쳐 숭선으로 향한다. 가이드 배 선생이 우리를 위해 선택한 길은 끝이 보이지 않는 밀림이었다. 사방에 자작나무를 비롯한 한대림 숲만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도로사정이 매우 나쁘기도 했지만 그 숲의 바다를 빠져나오는 데 3시간 이상은 걸린 것 같다! 백두산의 품이 넓은 건지 중국이라는 땅덩이가 큰 건지..... 그 숲을 막 빠져나온 곳에 두만강 발원지가 있었다. 그곳은 북한 땅이라 들어갈 수는 없었고 철조망 너머 그저 가늠만 해 볼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실개천 같은 두만강이 나타났다. 저녁 물안개가 어린 저 가녀린 두만강! 한 걸음으로 건너 뛸 수 있을 것 같은 맑은 저 물줄기엔 질긴 숙명처럼 철조망이 줄곧 함께 흐르고 있다. 절대 놓아주지 않는 스토커처럼.... 저 완강한 철조망이 왜 휴전선의 그 철조망인 것 같은 느낌이 자꾸 드는 걸까? 예전엔 이쪽 동네 아이와 건너 동네 아이가 매일 저 개천을 건너다니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을 텐데. 그리고 지금도 자연은 그저 꼭 닮은 채 이어져 있는데......
그런 감상에 젖으며 얼마를 갔을까? 어느 새 어스름이 내리고 있었다. 저 앞에 검문소가 보이고 잠시 검문이 있을 테니 여권을 준비하라는 가이드의 안내가 있을 때까지는 우리는 그저 태평했다. 그런데 총을 손에 들고 버스에 오른 중국 군인이 우리 여권을 전부 모아가고 짐칸에 실어둔 일행의 큰 가방 몇 개를 꺼내 뒤지기 시작하면서 분위기는 예사롭지 않게 돌아갔다. 우리 여행 자료집을 뒤적이다 내용을 캐묻기도 하고 우리 버스 기사와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요컨대, 늦은 시간에 군사지역을 왜 다니느냐 는 것이었고, 우리가 한국인이어서 탈북자와 연계될 우려가 있다고 경계하는 듯했다. 1시간 정도가 지나서야 ‘30분 내에 이 군사지역을 완전히 벗어나라’는 조건을 붙여 우릴 보내주었다. 하지만 그 군사지역을 벗어나는 마지막 검문소에서 우리는 한참을 또 시달려야 했고, 그곳을 떠나 5분이 채 되지 않았을 무렵 요란한 싸이렌을 울리며 군용차량 두 대가 나타나 우리 버스를 가로막았다! 피곤하고 짜증이 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배가 고팠다. 이유도 알 수 없는 실랑이가 또 한참 계속되었고 약간의 긴장감마저 흘렀다. 이런 젠장! 아무 죄 없이 이 무슨 소동이란 말인가!
겨우 풀려나 숭선 숙소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아홉 시가 넘어 있었다. 워낙 시장하기도 했지만, 오랜만에 보는 김치와 된장국, 맛난 손두부 덕에 꿀맛 같은 저녁을 먹었다. 그 난리를 치르고도 저녁식사 자리에서 시작된 술자리는 김정곤 샘 방에서 밤늦게 까지 이어졌다.

7일째: 7월 25일(토) - 숭선, 용정, 연길
아침에 일어나 보니 숙소 앞길 건너가 바로 철조망이고 두만강이었다! 어느 새 약간 넓어지긴 했지만 아직도 강이라기엔 너무 좁았고 바로 건너에 있는 북한 병사가 강물에 세수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그나마 여긴 마을 앞이라 강가에 정자 하나를 세워 놓았다. 정자에 앉아 무심히 흘러가는 강물과 철조망 걷힌 조국의 산야를 보자니 또 온갖 감회가 가슴을 어지럽힌다. 자연은 아무런 경계가 없건만 이 미련한 인간들은 경계를 만들고 철망을 치고, 그걸 지키느라 사우고 또 죽이고.... 도대체 뭘 하자는 걸까? 비감하기 그지없다!
다시 출발. 계속 철조망이 쳐진 두만강을 바라보며 차를 달렸다. 도중에 잠시 차에서 내려 빤히 건너다보이는 북한의 무산 시와 노천철광을 바라보면서, 그 철광이 모두 중국으로 수출된다는 얘기에 또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남북 정권의 어리석음 때문에, 철길을 타고 10 시간 내에 포항으로 옮겨져 남북 모두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그리고 되어야 할 저 철광석이 싸그리......
두 시간 남짓 차를 달려 일송정에 도착했다. 혜란강, 용주사, 용두레우물과 함께 가곡 ‘선구자’의 맨 첫머리에 등장하는 작은 언덕. 독립운동 하던 선조들이 원래 그곳에 서 있었던 큰 소나무 아래서 자주 회의를 했다는 곳. 그곳에 올라 우리는 ‘선구자’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목 놓아 불렀다. 일본 놈들이 죽여 버린 그 소나무 자리에 후세에 심은 작은 소나무 아래에서 혜란강을 바라보며.....
‘용정‘이라는 도시 이름의 유래가 된 용두레우물 근처에 있는 식당에서, 많~이 주는 냉면을 배불리 먹고 용정중학교로 갔다. 19세기 말에 이상설 선생이 세운 서전서숙 이후 이 인근에 세워졌던 은진학교, 대성중학교 등 여러 민족학교를 통합하여 현재는 용정중학교가 되었으나 옛 대성중학교 본관 건물이 남아 있어 학교역사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김재준 목사, 윤동주 시인, 문익환 목사 등을 배출한 이 학교 출신 안내원으로부터 간략한 설명을 듣고 여러 방을 둘러본 후 윤동주 시집 한 권을 사서 나왔다.
1920년대 우리 독립군이 무기조달을 위해 일본군 병사의 급료 15만 엔을 탈취했던 곳을 지나 명동촌으로 갔다. 그곳 당 서기로부터 그 마을의 유래와 교회, 학교, 그리고 윤동주 시인과 그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바로 옆에 있는 윤 시인의 생가로 갔다. 비록 얼마 전에 복원한 것이지만, 그 만주 오지에서 김약연 목사(외조부) 등으로부터 독립정신을 배우고 일본까지 건너가 광복의 길을 모색하다 투옥되어, 생체실험의 희생물로 처참하게 죽어간 시인의 고뇌와 그의 아름다운 서정이 눈물겹게 다가왔다. 김정곤 샘의 ‘편지’라는 시 낭송과 노래 독창을 듣고, 아주 최근에 복원한 동명학교로 갔다. 시간에 쫓겨 간단히 사진만 찍고 왔지만, 선조들의 공동체가 제 모습을 찾아가는 것이 기뻤다. 이번 기행을 다니며 늘 고맙고 애틋하게 느끼는 것은, 우리 조상들은 어떤 척박한 환경에 내던져져도 정착지만 마련되면 항상 다른 어떤 것보다 학교를 우선 세웠다는 사실이다. 연해주에서도, 저 먼 중앙아시아에서도, 그리고 이곳 만주에서도 그 점은 한결같았다. 국내에서도 1940년대 후반에 개교한 학교가 정말 많다. 일제로부터 해방 되자마자 정부가 수립되기도 전에 지역 유지들이 중심이 되어 학교부터 세웠던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급속한 경제성장이나 민주화의 성공도 이런 아름다운 전통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현재의 용정시청, 옛 일본 간도총영사관 건물에도 잠시 들렀다. 보수공사가 한창이어서 내부를 볼 수는 없었지만 예전에 감옥으로 쓰던 지하실의 창틈으로 세어 나오는 냉기를 서늘하게 느끼며, 그 습하고 추운 곳에서 온갖 가혹한 고문에 시달리며 지내야 했을 독립투사들을 생각했다. 그놈들에게서 배운 못된 기술은 1990년대까지 우리나라에도 살아있었고 나도 그 일부를 경험해야 했다. 웬수같은 제국주의자, 그리고 친일파 놈들! 고초를 겪으신 조상들께 간단히 묵념을 올리고 숙소로 향했다.
어번 여행을 통해 고려인과 조선족들의 아픔과 애환, 그리고 불굴의 정신을 실감할 수 있어 좋기도 했지만, 푸짐한 음식과 너무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해서 더욱 고맙고 기쁘다! 물론 술도.^^ 여행을 다니다보면 음식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하고, 동반자들 땜에 마음 상하는 일이 허다한데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여행을 함께 한다는 것은 사람을 더 깊이 만나는 일이다!

8일째: 7월 26일(일) - 연길
오늘은 무척 한가롭다. 정말 맛없는(!) 아침식사를 하고 11:30까지 방에서 쉬었다. 다른 분들은 쇼핑을 한다고 연길 서시장으로들 나갔으나 여기서 물건 살 생각이 전혀 없는 나로서는 그 번잡한 곳을 갈 이유가 전혀 없었다. 훈춘에서 대규모 시장을 구경하기도 했고, 어제 저녁식사를 하려 오가면서 이곳 시내 중심가는 대충 구경했기 때문이다. 일기를 정리하며 한숨 더 잤다.
오늘은 일정도 단순하고 가까워 관광버스를 어제까지만 빌렸기 때문에 12시가 다 되어 조선문독서사로 택시를 타고 갔다. 작년에 우리 집에서 홈스테이를 했던 주영이가 어린이희망학교로 오게 해준 그곳이다. 선생님 한분께 물어보니 잘 안다고 반가워 하셨다. 중학교에 진학했고 올해는 참가하지 못한다고 하셨다. 조금 섭섭 ㅠㅠ
대표 선생님께 이곳의 연혁과 현황을 들으며 내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많은 분들이 우리 민족의 말과 얼을 지켜내기 위해 정말 헌신적으로 일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 저 못돼먹은 인간들과 물신이 판치는 이 세상이, 구석구석에서 피눈물로 헌신하는 저런 이들에 의해 그나마 이만큼 살려지고 있구나! 절실한 느낌이 왔다.
점심식사도 여~엉 핀트가 안 맞았다. 조선문독서사 대표님이 나름 우리를 배려해서 추천하신 최신형 샤브샤브 불고기 부페! 정말 멋질 것 같지 않은가? 그러나...... 개인별 샤브 냄비가 각자 앞에 있는 전기레인지에 올려져서 부글부글, 6인용 테이블에 2개씩 놓여있는 숯불구이 판 위에서는 삼겹살과 목살, 양념오리고기와 양념 낙지가 지글지글, 부실한 에어컨은 비실비실, 온몸에 땀이 비 오듯 흐르는데 이름도 알 수 없는 온갖 야채와 소스들을 저 멀리서 가져오느라 시끌벅적..... 뭔 맛인지도 모르겠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된장과 김치가 너무나 그리웠다. 엉엉...
대충 먹는 둥 마는 둥 도망치듯 나와 가까이에 있는 연변대학으로 갔다. 아이돌 급으로 늘씬하고 잘 생긴 예술대 교수님의 안내로 학교를 둘러보고 안내 동영상도 보았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조선족 수가 줄면서 이 대학의 조선족 학생 수도 현저히 줄어 지금은 약 20%에 불과하다고 해서 안타까웠다. 교수진은 이 학교 출신자들이 많아 현재도 2/3는 조선족이라는데 시간이 지나면 이마저도.... 남한이나 다른 곳으로 떠나는 이들이 대체로 행복해질 수만 있다면 자치주의 위상이 다소 흔들려도 어쩔 수 없겠지만 과연 그런 건지....
여기서도 부산의 남산놀이마당의 전통예술을 살리려는 끈기 있는 숨은 노력이 배어 있음을 알게 되어 좋았다. 얼쑤!^^
이제 주요 일정은 다~ 끝났다. 오늘 밤을 잘 보내고 내일 아침 비행기만 타면 된다. 걱정하던 태풍도 다행히 빨리 지나간단다. 일행들에게 “내가 태풍하고 협상해서 어차피 부산 옆을 지나가고 싶다니까 그렇게 하되, 하루 일찍 지나가라고 했으니까 염려마라!” 고 뻥을 쳤다. 후후

귀환: 7월 27일(월) - 연길, 부산
부산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 8일의 여정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딴에는 역사에 관심도 있고 좀 안다고 자부도 했지만, 역시 현장을 다니며 발로 몸으로 배우는 건 질적으로 차이가 난다. 이런 뜻 깊은 배움의 기회를 만들어 준 이광호 샘을 비롯한 여러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온몸으로 노고를 아끼지 않은 보름이와 스텝들께도 따스한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앞에서도 여러 감상을 피력했지만, 러시아와 중국을 다니며 이곳 동포들의 모습을 보고 이야기를 들으며 언뜻언뜻 뇌리를 스쳐가며 집요하게 남아있는 한 가지가 있다. 자이니치! 한자로는 在日이라는 어정쩡한 이름. 징용으로, 징병으로, 또 정신대로 끌려가 어쩔 수 없이 주저앉아 버린 이들의 후예. 그리고 1948년 4.3의 피바다를 피해 밀항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후손들의 고단한 이름이다. 침략의 역사를 반성하지 않는 나라에서 그들은 ‘조센징’으로 살아가며 또 얼마나 힘겨운 삶을 영위했을 것인가! 군함도에서, 큐우슈우 탄광에서, 관동대진재의 아수라장 속에서, 원폭 터지는 히로시마에서, 그리고 극우 혐한파들이 활개 치는 오늘의 일본열도에서...... 우리는 그들도 결코 잊지 말아야 하며 그들이 조금이라도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아, 제일 좋은 방법은 바로 통일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