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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일, 독립군의 길을 걷다 후기(김주원)
번호   5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10-08 조회수   35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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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와 연변 여행기
김주원
<블라디보스톡 야경>
비행기에서 본 블라디보스톡의 야경은 고요한 꿈을 뿌려놓은 것 같았다. 네온사인은 거의 보이지 않았고 가끔 보이는 탑과 같은 건축물에서 나오는 빛과 깊숙이 들어온 바다와 옅은 구름으로 신비한 느낌이 들었다. 공항에서 호텔까지 거리에 사람들을 별로 보지 못했다. 젊은이들 몇이 지나는 것을 보았고 아파트의 불은 대부분 꺼져있었다. (7/19)

<시베리아 횡단열차>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잠시 탔다. 열차 칸은 넓었고 한 줄에 세 명씩 앉는데 여유가 있다. 레일 폭이 우리나라 것보다 크단다.
러시아인들은 거의 말이 없고 우리 일행들만 소리 내어 이야기 했다. 이 곳 사람들은 영어를 거의 몰라 의사소통을 할 수 없다. 해변을 따라서 나 있는 길에 드문드문 해수욕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시베리아 벌판>
블라디보스톡에서 우수리스크로 오는 길에 벌판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낮은 산이 멀리 보이다가 지평선이 드러나기도 했다. 말이 놀기 좋은 들판에 드물게 소들이 풀을 뜯고 있고 경작지인지 초지인지 잘 구분할 수 없는 푸른 벌판이 경계가 없었다. 그냥 탄성만 나올 뿐이었다.
지금은 러시아 땅이지만 극동의 유목민이 살던 지역이다. 옛날 유목민들이 쉽게 두만강을 건너 남쪽으로 올 수 없었던 이유는 함경도의 험준한 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고향마을>
블라디보스톡에서 우수리스크로 가는 길은 극동 시베리아벌판이다. 어쩌다 가끔 소떼를 보거나 경작지를 볼 수 있을 뿐 지평선이 보이는 광활환 벌판이다. 차창을 보며 감탄을 연발할 수 밖에 없었다. 붉은 빛을 띠는 야생 수수와 흰색들꽃 무리가 가득한 벌이 지나더니 낡은 도로로 접어들었다. 드문드문 집이 나오더니 허름해 보이는 단층집이 나왔다. 나무판 위에 고향마을이라 써져 있다.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성분과 20대 초반의 여성이 우리를 맞아 주었다.
오른쪽 옆에 집이 몇 채 있을 뿐 주변은 풀이 가득한 벌판이다. 건물은 식당을 중심으로 강당처럼 넓은 곳과 숙소가 대칭형으로 있었다. 강당안에는 한국어를 공부한 흔적인지 창, 벽이라고 쓴 글 밑에 러시아어가 써져 있었다. 숙소는 방이 몇 개 되었는데 침대가 2층으로 된 방도 있고 넓은 침상으로 된 방도 있었다. 전체 건물처럼 방도 허름했다.

<우수리스크 거리 풍경>
우수리스크에서 여유가 생겨서 호텔주위를 산책했다. 7시, 섬머타임을 적용해서 아직 6시경이다. 광활한 평원에 조성된 이 도시는 우리 같으면 소도시규모인데 거리는 넓고 인도가 따로 확보되어있어 가로수 그늘을 따라 걸을 수 있다.
푸틴, 마피아, 어려운 경제로 알고 있는 여기는 평화롭다. 큰 소리를 지르는 사람은 이틀간 볼 수 없었고, 여자들은 예쁘고 세련되어 보이고 남자들은 푸틴을 닮았다. 거리의 대부분은 슬라브족이고 가끔 아이들의 무리 중에 고려인으로 보이는 이들이 끼어 있고 흑인은 없다. 거리의 사람들도 내게 거의 눈길을 주지 않는다. 아이들은 분수대 주위에 놀고 엄마는 유모차를 밀고 할머니는 개를 산책시킨다. 호객행위는 없고, 종업원은 웃지 않는다. 고층건물은 없고 가장 높아 보이는 아파트가 10층 정도이다. 특이한 것은 외벽을 마무리 안한 건물이 많다.
이곳의 정부인 것 같은 건물은 앞에 넓은 분수대와 화단을 갖추고 앞에 따로 광장을 확보하고 있다. 의료의 수준은 낮아도 무료이며 교육은 고등학교까지 무상에 대학은 대부분 장학금을 받고 가며, 개인의 소유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주택은 국가에서 임대해서 사용한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마트가 있고 물건은 풍부하다.
푸틴의 권력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만 이런 안정감을 알지 못했다. 더구나 세 번의 결혼이 평균이라니 역동감까지 있다. 기본생활에 대한 보장에 따라 삶의 태도도 이렇게 바뀌는 것인지. 부럽다. 이 나라는 중국과는 전혀 다른 나라다. (7/21)

<중화인민공화국만세>
중화인민공화국만세다.
12시 경부터 시작된 국경통과 절차가 3시 반이 되어서야 끝났다. 러시아의 통과 건물은 보기 싫은 철조망 사이에 있는 가건물이었다. 느린 검색에 화장실도 냄새 나고 절차도 느렸다.
그런데 중국쪽은 건물도 화려하고 통과 역시 간단했다. 오랜만에 보는 웃는 얼굴도 한몫했다. 러시아 지역 쪽의 경작지를 찾기가 어려웠는데 여기는 옥수수, 벼로 덮혀 있었다. 또 다른 세계로 들어왔다.
국경을 넘자 갑자기 시간이 늘어났다. 다시 한 시다.
중화인민공화국 만세!

<조선족 소학교> - 교장의 발언 요약
조선족 초등학교는 도문시에 1개 있다. 학생 600여명, 교사 100여명이다. 학생 수는 줄었으나 교사는 줄지 않아서 교사 수가 많은 편이다. 조선어로 말하고 수업한다. 80여년 된 역사를 갖고 있다. 2010년도에 학교를 새로 지었다. 결손 가정 자녀가 70%이다. 민족언어를 잃지 않고 살아가게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교류를 바란다. 언어교육이 잘 되어있어 진학취업에서 유리한 면이 있다. 조선어를 해야해서 학업부담은 많다. 24개 학급, 30명 이하가 규정이다. 역사교육은 중학교에 가서 배우고 한국사는 세계사의 부분으로 배운다. 학비는 의무교육은 무료다.

<두만강에서>
두만강은 푸른물이 아니었다.
흐린 물만 다리 아래를 굽이져 흐른다. 노젓는 뱃사공은 없지만 모터를 붙인 뗏목을 탔다.
노래를 불렀다.
두만강 푸른 물에~
끝도 없는 긴긴 밤을~
유유하게 강은 흘러가도 마음은 편하지 못하다.
북한 쪽의 산은 가파른 벽처럼 솟아 있고 초소는 유령처럼 서 있다. 시베리아는 강이 적셔놓은 기름진 땅도 인적이 없어 풀들만 무성한데 조선은 가파른 산기슭도 부족하여 갈아엎는다.

<이도백화>
1시경에 두문에서 출발하여 6시 40분에 이도백화에 도착했다.
구불구불한 시골길을 지나 백두산이 아득히 보이는 전망대를 지나더니 끝이 안보이는 고원 평지를 지나더니 호텔과 음식점이 가득하고 버스들로 가득찬 곳에 도착했다.

<백두산>
7시에 숙소를 나와 1시간을 달린다. 길 양쪽의 숲에는 미인송, 전나무, 자작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다. 놀라운 것은 여전히 거의 평지를 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백두산 올라가는 버스 타는 산문은 사람으로 가득 찼다. 수학여행철의 에버랜드 앞과 같다. 입장권과 버스표를 사고 천지로 올라가는 짚차를 타는 곳에 오니 9시 15분이다. 그 엄청난 인원에 비하면 신속한 시스템이다. 올라오는 길은 오래된 침옆수림 사이로 쭉 뻗어있었다.
짚차는 10인승인데 계속해서 사람을 실어나른다. 90명이 줄어드는데 3분 정도 걸린다. 아마 짚차를 타기까지 15분이 걸릴 것 같다.
예상시간에 짚차를 탔다. 짚차는 롤러코스터를 타듯이 굽은 길을 빠르게 올라간다. 10시 10분 정상부근 도착했다.
천지로 올라가는 길은 높은 쪽과 낮은 쪽이 있는데 낮은 쪽을 먼저 보고 높은 쪽을 보았다. 역시 줄을 서서 올라간다. 길목 곳곳에는 안전요원들이 서 있다. 가파른 봉우리들로 둘러싸인 천지의 푸른물을 볼 수 있었다. 사람들에 밀려서 겨우 사진 몇 장을 찍고 내려와서 내려가는 짚차 타기 위해 또 줄을 서야 했다. 멀리 떠나는 아이 손도 못 잡고 경황없이 보내고 온 기분이다.
백두산 정상 부근은 웅대한 곡면으로 둘러싸여 있고 이끼 비슷한 낮은 풀과 노란 꽃들이 피어있었다.
글쎄 이런 과정을 겪어야 한다면 다시 오고 싶지는 않으나
매우 새로운 풍광을 보여주는 곳이다.

<백두산에서 용정으로>
백두산 두만강의 상류를 따라 내려와 용정으로 가는 길을 잡았다. 비포장도로를 한참 내려와 두만강 발원지를 지나 내려오는데 중국군 초소에 막혔다. 접경지역이라 그런지 검문이 엄격했다. 여권과 비자를 검사하더니 짐까지 검사한다. 카메라도 검사하고 다음 초소까지 쉬지도 말고 촬영도 말고 벗어나란다. 그래서 다음 초소에 오니 또 검문을 하고 다시 출발하는데 짚차가 달려와 막아선다. 안내인과 기사가 나가서 이야기하고 있다. 20분 정도 시간이 지났다. 어이없게도 이유는 우리 자료집 때문인 것 같다. 발해, 동북공정 등이 있다고 무슨 내용인지 상세히 물었다고 한다. 군인들은 안전을 위해서 한 것이니 이해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여기도 막힌 부분이 많은 것 같다. 어쨌던 시간은 8시 30분을 넘었고 우리는 배가 고프다. 사방은 이미 칠흑같이 어둡다.

<숭선나눔산장>
어젯밤 검문으로 인해 늦게 도착하게 된 숙소 이름이다. 이 지역의 조선인 소학교가 있던 자리인데 조선족이 운영하고 있다. 어젯밤에는 버들치 튀김과 된장매운탕, 고사리 무침이 맛있었고 오늘 아침에는 두부가 좋았다.
여기는 두만강 상류이다. 마을 앞에는 철조망도 없어서 강에 발을 담글 수 있다. 강폭도 좁아서 건너편의 북한인의 말소리가 들릴 정도다. 숙소 앞 정자 아래는 좁은 여울이라 걸어서 쉽게 건너갈 수도 있다.
얼마전 북한 군인 몇몇이 넘어와 살인도 하고 도둑질도 해서 경계가 엄해졌다고 한다. 어제의 검문이 그 연고인 것 같다.
아침에는 어떤 긴장의 조짐도 없었다. 상류 쪽으로 산책을 가니 북한쪽에는 벌목한 나무를 쌓아두는 곳으로 보이는 곳이 있었고 아이들 몇이 길에서 놀고 군인 한두 명이 걸어서 지나갔다.
다리가 있는 곳에까지 갔는데 이 곳 사람 3명이 낚시를 하고 있었다. 그들이 낚은 것은 검지 손가락만한 크기였는데 돌아와 물어보니 산천어 새끼일거라 했다.
길의 암벽에는 화강암으로 보이는 층 위에 흙이 있고 주상절리의 모양을 한 암반이 있었다.
여기의 용암은 백두산에서 온 것일까? 먼 옛날 용암이 이 땅을 뒤덮었을 때는 지옥도가 따로 없었을 것이다.
정자에서 마주 보이는 북한쪽 산은 100m정도의 높이로 벼랑을 만들며 솟아 있다. 60m정도까지는 화강암이고 그 위가 화산암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화산활동 이후에 솟아오른 산일 것이다.

<무산시가 보이는 곳>
두만강 변을 떠나서 용정으로 왔다. 오는 길에 무산시를 강변 언덕에서 보았다. 학교로 보이는 건물, 몇 개의 관청으로 보이는 건물외에는 모두 낡은 슬레이트집이었다. 산쪽에는 굴을 팔 필요없이 땅에서 그냥 철을 채취한다는 광산이다. 강변 모래사장에는 아이들이 물놀이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발해 성터>
한줄기 해란강을 따라 가다보면 적당한 구릉이 돌려져 있는 넓은 벌이 발해의 도읍인 서고 성터다. 무언가 성터를 복원하고 있는 거 같기는 한데 철망으로 된 울타리가 있어 들어갈 수 없다. 밖에서 보니 나무로 만든 보도가 있다.
발해는 토성을 쌓았는데 내성과 외성이 있는데 조금 멀리 평원을 감싸고 있는 긴 언덕이 외성의 역할을 하고 있다.
궁금해지는 것은 만주는 유목민의 땅이었을텐데 성을 쌓은 발해인들은 유목민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다. 아니면 유목민과 농경민족의 연합이었다가 발해의 멸망에 따라 유목민은 남하했을 수도 있다.
동북공정으로 발해의 문제는 민감해졌다. 하지만 대부분 기록에 남은 것이 없으니 보고 싶은 대로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역사를 기록에 남기는 문화는 쉽게 확립되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적어도 학문과 역사에 대한 이해와 능력을 갖는 지배층이 출현했을 때 나타나는 것이다.

<일송정>
일송정에 올랐다. 정자모양으로 생긴 소나무가 있었다는 곳이고 해란강의 댓구가 되는 곳이다. 가파른 계단 길을 오르니 탁 트인 넓은 들이 보인다. 한쪽으로는 산이 이어져 있고 앞쪽에는 용정시가 펼쳐있고 해란강은 굽이져 흐르고 있다. 이 들판에서 말을 달렸는지 활을 쏘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용두레 우물과 삶터는 남아있다.
소나무에 술을 한잔 올리고 일행과 돌려 마셨다. 목 놓아 노래를 불렀다. 거친 꿈이 깊었~~나.
<대성학교와 윤동주 생가>
대성학교는 ‘사립’이라는 팻말을 달고 있다. 지금의 학생들이 공부하는 건물은 새로 지었지만 옛 건물이 남아 있다. 돌로 지은 2층 건물인데 안정감이 있어 보인다. 내부는 전시실과 교실, 기념품과 서적 판매하는 곳이 있다.
이 학교 출신의 안내인이 전시실을 돌며 연변 말씨로 설명한다. 대성학교를 설립과정과 졸업한 인물들과 독립운동과의 관련을 설명했다.
시외곽으로 다시 나와 윤동주 시인의 생가로 갔다. 낮은 언덕이 둘러싸인 벌에 5가구가 조선에서 이주하여 집을 지었다. 지금은 명동촌이라 불리고 있고 교회와 송몽규 생가와 명동학교 건물이 남아있다.
이 마을 촌장이라는 분이 설명을 해 주셨다. “나의 행동이 나의 유언이다.”라는 말을 남긴 김약전 목사의 기념비가 부서진 채로 남아있다. 문화혁명 때 화를 당한 것인데 복원하지 않고 그대로 둔 것이다. 김약전 목사는 주민들에게 같이 예배 볼 것을 강요했다 하지만 종교와 노선에 구분 없이 사람을 대했다고 한다.
시인의 시가 비석과 보판에 새겨져 있다. 고통스런 성찰과 빛나는 서정의 언어가
생가 앞마루에 일행과 앉았다. 시를 외워서 때를 맞추어 잘 암송하는 김정곤씨가 시를 암송하고 노래를 불렀다. ‘긴긴 세월을 줄이어 그냥 생각이 났다고 쓰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기서 태어나 이 하늘을 보았던 소년은 빛나는 서정으로 어두운 시대를 넘었다. 그의 별에 봄이 왔는지는 모르나 그는 우리 마음을 흔드는 이름이 되었다.

<조선독서원과 연변대학교 방문>
애가 많이 쓰이는 하루였다. 조선족 아이들에게 조선어로 된 책을 읽히는 활동을 하고 있는 조선문독서사를 방문했다. 오래된 아파트를 개조한 공간으로 한글로 된 어린이 책부터 어른 책까지 빼곡이 꼽힌 낡은 아파트였다. 대부분이 남한 책이고 연변책과 북한책은 소수였다. 3명의 정규직직원과 두 명의 대학생이 함께 일하고 있었다. 방과후에 학생들이 여기에 와서 책을 읽고 독후감도 쓴다고 한다. 여기서도 소학교에서 중학교로 가는 과정의 책읽기가 어렵다고 한다. 이 도서원의 대표는 50대 후반의 여성이었는데 민족사회의 위기에 대해 안타까워했다. 자치주이긴 하지만 조선인의 수는 갈수록 줄고 그나마 상당수가 남한 등지로 돈 벌러 나갔다고 한다. 절반이 넘는 아이들이 부모없이 자라고 있다고 한다.
연변대학은 이 지역의 중심학교로 교수의 대부분은 조선인이다. 안내를 나와준 분은 예술대의 김문청 교수다. 그의 안내를 따라 학교의 시설을 둘러보고 홍보영상을 보았다. 예술대 학생들의 공연실황을 편집한 것인데 전통무용과 악기연주가 많았다. 부산의 남산놀이 마당에서 수년간 사물놀이 전수를 하고 있다고도 한다. 조선인 학생 수는 갈수록 줄고 있고 민족예술의 미래에 대해서도 고민이 깊다고 한다.
연해주에서부터 연변까지 독립군의 길을 따라 왔다. 그 길에 확인한 것은 고려인과 조선인의 끝나지 않은 유랑과 아픔이었다. 고려인들은 대부분 언어를 잃었지만 척박한 땅을 개척하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삶은 바친 선인들을 기념하고 있었다. 조선인 사회는 해체의 위기를 맞고 있지만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학교를 유지하고 우리글을 읽히고 전통예술을 계승하는 노력을 하고 있다.
남들과 달리 두 개나 되는 모국은 이들을 돌보지도 않고 이용하거나 천대하고 있다. 남으로 취업을 위해 오는 이들에게 사기를 치고 국가는 까다로운 비자발급으로 그들을 모욕하고 내국인들은 무시하고 천대한다. 문제는 이 상황이 진행형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부모의 돌봄이 없이 자란 2세들의 삶을 생각하면 안타까움이 크다.

우수리스크의 고향마을에서 들판이 보이는 식당에 앉아 아침을 먹을 때 울컥했었다. 이 벌판을 파고 씨를 뿌리며 새로운 터를 개척하다 또 다시 험난한 유랑의 길을 가야했던 이들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 밤 우리 일행은 들판의 노을을 긴의자에 앉아 오랫동안 보았다. 내 기억속에 붉은 빛에 덮인 초록 벌판이 슬픈 빛인 것은 아픔이 아직 계속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순일 선생의 환갑을 축하하며

아무도 모르거나
사실이 아닐지도 모르나
교사 이순일은 신문에 시를 써서
미국의 전쟁책동을
폭탄을 들고 뛰어 들겠다고
준엄하게 경고하여
물리친 바 있다.
(본인은 미 대사로부터 아무런 답변이 없다고 불만스러워 한다)

수염을 기른 뜻은
염색하는 학생들이
존중받아야 하기 때문이란다.
아침 맞이를 최초로 시작했고
학생들과 함께 아리랑을 읽고
첫사랑의 감성을 가르친다.

언뜻보면 퉁명스럽지만
자세히보면
소년같은 장난기와
호기심이 가득하다.
수염만 없다면
탄력있는 피부가 드러나
심지어 나보다 젊어 보인다.

“외세를 물리치고
조국통일 이룩하자!“
이순일이 하면
식상한 구호
진정성이 있는
울림으로 변한다.

이리저리 재지 않고
단순하게 부딪히지만
늘 새로운 감동을 만든다.
그가 있는 곳은
진지한 호기심도 생겨나고
유쾌함이 전염된다.

나는 이순일의 두만강을
12번도 더 들었다.
술 마시고 노래도 부르며
힘차게 오래 살아
오시는 님을 만나시라.
철조망을 영구히 걷어낸 첫 길로
대동강 건너 묘향산을 돌아
백두산을 오르시라.